카테고리 없음

한수의 블루스

알레시스 2022. 4. 17. 12:07

블루스 : 19세기 말 미국의 흑인들에 의해 탄생한 음악, (이 글에서는) 한(恨)
블루노트 : 블루스를 만드는 특정 음계 또는 그러한 요소

   26살, 첫 직장에 들어갔다. 내 계획은 완벽했다. 250만 원 정도의 급여를 받아서 내가 정말 하고 싶던 음악 공부를 내 마음대로 해보는 것. 이거였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저녁 7시에 퇴근하면 하루는 이미 끝나 있었다. 몸은 너무 피곤했고 그냥 쉬고 싶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매주 몇 번씩은 으레 저녁 술자리가 있었다. 나는 거절할 줄 몰랐다. 선배도 후배도 몇 명 없는 작은 회사에서 내가 배운 사회생활은 그저 성실히 일하면 성공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받은 내 첫 월급 90만 원. 그중 30만 원은 월세로 내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썼다. 남는 게 없었다. 그다음 달부터는 급여가 올라 무언가 해볼 돈은 생겼지만 시간이 없었다. 결국 6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나왔다.
   그리고 아무 소득 없던 무직의 시간. 그 시간 동안 음악을 생업으로 삼는 것이 적절한지 깊은 고민을 했다. 내가 가진 실력, 음악에 대한 간절함 그리고 경제적 환경에 대해 특히 집중했다. 결론을 내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돈을 버는 일과 내가 좋아하는 일을 분리하기로 했다.

어린 한수와 현재의 한수 [TVN "우리들의 블루스" 화면캡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봤다. 그곳에 나오는 인물 중에 "한수"가 있다. 한수는 기러기 아빠다. 아내와 딸은 미국에 있다. 미국에 있는 이유는 딸 때문이다. 딸은 골프 선수로 성공하기 위해 미국에서 투어를 돌고 있다.
그런데 딸이 입스에 빠져 실력이 저조하다. 입스 극복을 위해서는 꽤 많은 레슨비가 필요한데 한수는 돈이 없다. 집은 이미 팔았고 퇴직금도 정산받았다. 아내와 딸은 이미 오랜 시간 미국에서 생활고를 겪으며 살고 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딸은 이제 골프가 즐겁지 않다고 말하며 한국에 가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수는 반대한다. 아주 극렬히.
   한수도 학창 시절에 꿈이 있었다. 농구 선수였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한 체 꿈을 접었다. 집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고 한수는 장남이었기 때문이다. 한수에게는 집안을 대표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딸이 자신의 미약한 경제력 때문에 골프의 꿈을 접어야 한다고한다. 한수는 자신의 짐을 딸에게도 넘겨주는 것 같아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한수는 가족에게 항상 미안하다. 풍요로운 다른 집안을 보며 느끼는 부러움조차 죄스럽다. 모두가 내가 잘되길 기대하며 밀어주는데도 나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수는 현실의 벽을 종종 느꼈다. 그럴때면 더욱 답답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 상황을 탓 하자니 나를 도와준 가족들을 욕보이는 것 같고, 나의 모자란 능력을 탓하자니 그간의 노력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억울했다. 하지만 결국은 내 탓으로 돌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체 모든 원인을 자기 자신의 무능력으로 돌려야하는 것, 한수의 블루스는 그것이었다. 그런 한수에게 '골프가 인생의 전부'라고 말했던 어린 시절 딸의 말은 한수의 마음속 블루노트를 짚었다. 사랑하는 딸만은 가정에서 뒷바라지 못한 잘못을 본인 탓으로 돌리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골프를 스스로 그만두려는 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한수의 블루스가 내가 가진 것과 비슷해서 내내 마음이 착잡했다. 나 또한 즐거움 없는 일로 돈을 번다. 가끔은 풍요로운 누군가를 바라보다 불쑥 솟아난 부모님 원망에 자존감이 바닥 치기도 한다. 아무도 내게 그렇게 하라고 한 적이 없는데, 혼자 자책하고 혼자 반성한다. 인생에서 실패와 고난은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지만, 평생을 지고 가져갈 수밖에 없는 한스러운 마음은 발목에 채워진 족쇄처럼만 느껴진다. 기쁜 일이 있어도 마음 한켠을 무겁게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의 아이의 삶은 나와 다르길 바란다. 인생의 모든 순간이 행복으로 가득 차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해결되지 않는 슬픔은 물려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 경험이 슬프다고해서 남에게도 슬픈 것일까? 모든 슬픈 경험이 모두 슬픈 결과로 귀결되는걸까? 꼭 그렇진 않다. 인생이 흘러가는 방향은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결과에 대한 원인을 찾고 싶어한다.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하지만 콕 집어 어떤 지점이 현재를 이루는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지않나. 이 말에 동의한다면 한수나 나 같은 사람들은 아이에게 내 경험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 도움이 되고 싶다면, 현재 상황에서 안되는 것은 털어내고 쓸만한 부분을 찾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현명하다. 그럼 어떠한 슬픔의 순간도 미래에는 아름다운 추억이 될테니까.
.
.

오늘 글은 여기서 마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