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도시기행2 그리고 교회
[도시를 여행하는 새로운 방법을 배우다.]
책을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을 일부 쓴다.
"집은 건축주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
"로마제국 시대에 지은 교회는 무섭지 않다. 아테네 도심 골목의 오래된 정교회들은 아담하고 소박하고 정겹다."
"그러나 중세 유럽의 대세였던 고딕 양식 성당들은 그렇지 않다. 높고 날카로운 첨탑과 장중한 스테인드글라스로 '경외심' 또는 '공포감'을 강요한다."
고딕 양식의 교회와 그 안에 그려진 여러 미술 작품들을 보며 슬픔을 느낀적은 없었다. 그저 멋진 모습을 보며 감탄만했었다. 그런데 유시민 작가가 바라보는 시각은 달랐다. 그다지도 위압감 넘치는 건축물을 왜 만들었는지, 그 의도가 무엇인지 이야기해주었다. 유시민 작가의 시각에 맞추어 보니 멋진 고딕 양식 교회의 뒤편에 그들의 횡포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보였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한번 더 절감한다. 앞으로 더 많이 공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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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마, 중세, 그리고 현대 한국의 교회]
- 이 책을 보다가 중세의 타락한 교회와 현대의 일부 교회와 비슷한점을 느껴 글을 쓴다. 참고로 나는 일반적인 장로교파 개신교인이다. -
건축물은 건축주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 그럼 현대의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소수의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수 많은 교회들은 교회 확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더 큰 교회를 짓고 더 많은 자교회를 설립하는게 수 많은 교회 공동체의 꿈이며, 대부분 신자들은 그것을 "부흥"이라고 이야기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교회 확장은 왜 하는가? 대부분 목회자들은 종교를 전파해야 한다는 성경 내용을 근거로 든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전도는 "교세의 확장"이지 "개별 교회의 확장"이 아니다. 교회는 신앙생활에 필요한 정보 교류와 물리적 공간이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충분하다. 구약시대처럼 제단이 필요하지 않고, 예배의 형식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큰 공간과 자본이 필요할리 없다. 그럼 교세가 아닌 교회의 확장은 누구에게 좋은 것일까?
많은 교회에서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구절을 근거 삼아 교회 확장에 힘쓴다. 이를 위해 목회자는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이 있다는 말을 부끄럼없이 설교에 섞어 성도들에게 이야기 한다. 성도들이 내는 돈이 성스럽게 느껴지도록 친절히 헌금에 이름을 붙여준다. 건축헌금, 십일조, 감사헌금, 주정헌금, 선교헌금 등 헌금의 이름마다 성도는 돈을 내며 다채로운 뿌듯함을 느낀다. 목회자는 이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돈을 낸 행위가 내적인 만족감으로 머물지 않고 사회적 인정 욕구를 충족하는데 쓰이도록 격상시킨다. 모두가 볼 수 있게 예배시간에 헌금을 단상위에 올려둔다. 그리고는 헌금 낸사람들의 복을 비는 기도를 올린다.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뒤엎었던 예수가 지금의 교회를 바라본다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약 2,000년 전 이스라엘 지역 어느 마굿간에서 태어난 예수의 썰을 풀어보겠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의 기독교, 즉 유대교는 제사를 지내는 종교였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기 위한 성전이 있었다. 유대교 신도들은 정해진 기간이 되면 제사를 지내기위해 성전으로 가야했다. 그런데 제사에 드릴 제물을 어찌 구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정해진 것이 없었다. 성전 앞에는 이를 이용해먹는 사기꾼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옳은 제사 방식이라고 말하며 무지한 신도들에게 제물을 팔았다. 만약 어떤 신도가 정성스레 키운 어린 양 한마리를 제물로 바치려고 하면, 사기꾼들은 그건 공인된 제물이 아니라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양을 비싼 값이 파는 식이었다. 교리는 잘 모르지만 신앙심만은 깊었던 교인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공인 받은 제물을 사야했다. 한편, 제사를 관장하는 제사장들은 사기꾼들의 일탈을 눈감아주었다. 그리고 뒷주머니로는 그들의 수익을 나눠가졌다. 젊은 청년 예수는 그 꼴을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모두 뒤엎어 버렸다.
이 이야기는 신약성경의 마태복음 21장, 마가복음 11장, 누가복음 19장, 요한복음 2장에 쓰여졌다. 4개의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정경들인데, 모두 저자가 다름에도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구약과 신약을 정경으로 삼는 기독교인이라면 예수가 실제 행했다고 볼만한 아주 중요한 사건인 것이다.
흔히 이 사건을 "예수의 성전정화"라고 하는데, 예수의 성전정화는 어느 교회에서든지 일년에 몇번씩 설교에 올라오는 단골 주제이다. 그렇다면, 이를 설교하는 목회자와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신도들은 도대체 무얼하고 있는 것일까? 성경에서 정한적 없는 수많은 이름의 헌금들, 예수가 이야기하는 신앙생활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각종 종교행위들, 그리고 헌금 집행에 관해 여러 이해관계가 뒤섞인 모습을 보며 왜 아무도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걸까?
위압감 넘치는 모습으로 신자들을 핍박한 중세교회의 모습이 싫어 나타난 개신교가 다시 시간을 되돌리고 있다.
오늘 글은 여기서 마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