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씨앗을 자기 그늘에 뿌리지 않는다.
[말하고 쓰기에 취약한 나]
나를 잘 표현하려면 세 가지를 잘해야 한다. 첫 번째는 말하기, 두 번째는 쓰기, 세 번째는 행동하기이다. 나는 이 셋 중에서 행동하는 것만 잘한다. 이유는 행동하는 것만 잘 배웠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에는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집에는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었다. 그저 시킨 대로 하는 것은 너무 쉬웠다. 그래서 잘했다. 반면 말하기와 글쓰기에는 매우 취약했다. 나는 소심했고, 말이 많으면 사람이 실수한다는 격언을 진리처럼 생각해왔으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글을 쓸 일이 거의 없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주로 내 주변에는 자기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는 말 많고 활기찬 친구들이 많다.
말하고 글쓰기를 못하는 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행동하는 것만 잘해도 딱히 사는데 불편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교육받았던 환경에서는 나의 의사표현이 중요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학생으로서의 일반적인 가치관을 추구하고, 교회에서는(지금은 안 다니지만) 교인으로서 추구해야 할 대의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걸 내가 해야 할 일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내가 속한 집단에서 내 의견을 피력하거나 집단에서 추구하는 이상향이 옳고 그른지를 논쟁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받아들이면 편안했고 받아들이지 않고 내 의견을 이야기하는 순간 불편한 일이 생기는 것이었다. 또한 사회문화적으로도 왠지 남들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시끄러운 잡음을 내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보았던 것도 있다. 누구에게도 미움받고 싶지 않았던 나는 구태여 고집부려 내 의견을 피력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모두가 합의하는 일반적인 이상향을 비판적 사고 없이 추구하는 편으로 굳어졌다. 그러니 말하고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회사를 다녀보니 말하고 쓰는 게 너무나 중요했다. 회사는 누군가 시킨 대로 일하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회사는 내가 일을 시켜야 하는 곳이었다. 회사에 수익을 발생시킬 일을 만들어야만 회사와 내가 존속할 수 있는데, 새로운 방안을 만들면 그것을 내 상사에게 설명하고 근거를 남겨놓기 위해 보고서(글)를 써야 했다. 만약 상사가 내 보고서를 승인하면 이젠 설득(말)의 과정이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설명하고 그것이 상대방에게도 이익이라는 점을 열심히 이야기해야 했다. 이렇게 보고서를 쓰고, 설득하기 위해 말하는 과정이 끝나야만 비로소 내가 생각한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그러니 말하기와 쓰기를 못하고는 회사생활을 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뒤늦게나마 내 약점을 보완하고자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뒤늦은 훈련을 하고 있다. 어릴 때에도 책 읽고 글 쓰는 게 중요한 줄은 알았지만, 직접적으로 내 생계에 이런 식으로 작용할 줄은 몰랐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깨달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려나.
그런데 내가 어릴 때 최재천 교수님과 같은 스승을 만났다면 뒤늦게 이런 훈련을 할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싶다.
아, 또 남 탓을 하고 있는 건가.
[식물은 씨앗을 자기 그늘에 뿌리지 않는다]
최재천 교수는 스승의 가장 큰 덕목으로 제자가 클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을 꼽았다. 그러면서 이러한 비유를 들었다
"식물은 씨앗을 자기 그늘에 뿌리지 않습니다. 가능한 멀리 내치죠.
그래야 씨앗도 뿌리를 내리고 서로가 잘 자랄 수 있어요"
나는 이 말을 스스로에게 대입해보았다. 어찌 보면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게 스승이니까.
지금의 나는 내 주위에 씨를 뿌리고 있다. 안정적인 직장, 평온한 가정.. 모든 게 좋기 때문이다. 현재의 보금자리가 너무 좋아서 더욱 번창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 상태로 영원히 있을 수는 없다. 지금 뿌리 뻗은 곳의 지력이 다하면 나도 시들게 될 것이니 말이다. 지력이 다하기 전에 조금 나와 멀리 있는 곳에도 나의 뿌리를 뻗쳐야 한다.
다만 아직은 뿌리를 뻗쳐야 할 방향이 동쪽인지 서쪽인지 모르겠다. 일단은 조금 더 멀리 씨앗을 퍼뜨릴 수 있도록 키를 높이는 게 나을 것 같다. 지금처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내 아내와 딸아이를 잘 돌보면서 말이다.
근데 언제까지 키를 높여야 할까. 지금이라도 조금씩 씨앗을 던져놓으면 되는 건가? 아니면 목표 일자를 정해놓고 던져야 하는 건가? 흠.. 일단 조금씩 씨앗을 던져보겠다. 그중 하나는 뿌리를 내리겠지.
오늘 글은 여기서 마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