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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카테고리 없음 2023. 12. 10. 00:39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김희정 옮김 유교 문화권의 국가에서 사람들이 교육에 적극적으로 투자한 것은 공자가 학식을 강조해서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 후 토지 개혁을 비롯한 여러 정책을 통해 계층 이동이 가능해지면서 교육이 계층 상승의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편견 넘어서기, P. 56)
남아메리카 국가들이 자유 무역 정책의 선구자일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자유' 무역 정책은 '자유 의지'로 실시된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초반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를 벗어난 후 이 나라들은 영국이 이끄는 유럽 강국들의 압력을 받아 후대에 '불평등 조약'이라고 불리게 되는 협정에 서명해야 했다. 이 조약들에서는 다른 무엇보다 자체적으로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관세 자율권'을 약한 나라들로부터 빼앗아 자유 무역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전 세계가 더 잘살기, P. 169)
2명의 엄마가 자녀를 교환해서 상대방의 아이를 돌봐 준 다음 베이비시터에게 지불하는 금액을 서로에게 지불한다면 두 사람의 재정상태와 아이 돌보는 시간에는 아무 변화가 없지만 GDP는 올라갈 것이다. 심지어 두 엄마가 주고받는 금액 자체를 올리기만 해도 GDP는 더 증가할 것이다.(함께 살아가기, P.256)
1. 교육에 관하여
요즘 회사원들이 예전같지 않다고 한다. 과거에는 야근을 밥먹듯이 하고 주말에도 출근은 예삿일이었으며 승진을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았었는데 지금 시대의 회사원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도. 아니 내가 나를 돌이켜봐도 그렇다. 승진보다는 개인의 업무역량을 키우는데 집중하는 게 요즘 회사원들이다. 왜 그럴까?
회사원을 일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월급, 즉 "부"다. 부의 크기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철저히 상대적인 가치다. 현재 2만3천원을 주면 교촌치킨 한 마리를 시킬 수 있다. 만약 돈이 절대적인 크기라면 교촌치킨은 영원이 2만 3천 원이어야 한다.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 모두가 돈을 잘 벌어서 누구든지 2만 3천 원쯤은 쉽게 지불할 수 있다면 치킨의 가격을 오를 수밖에 없다. 공급할 수 있는 치킨의 양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돈이 많은 사람에게만 치킨이 제공되도록 가격은 올라야 한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내 주변사람의 부가 올라가면 나는 가난해진다. 부는 이런 성질 때문에 늘 비교할 수밖에 없다.
내 친한 친구놈 하나가 세계 유랑을 그렇게 해대더니 어느 날 꽤나 유명한 유튜버가 되었다. 돈도 잘 번다. 그 순간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나와 별다를게 없는 친구인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나?'
'나도 내 인생계획을 다시 세워보고 끈기 있게 도전해 봐야겠다.'
하루하루 근근이 안주하며 평온한 날들 지속되길 바랐던 내 마음속에 큰 도전감을 안겨준 건 내 상사의 인생조언도 아니고 저명한 인사의 좋은 말씀도 아닌 나와 가장 가까웠던 친구의 성공 사실이었다.
40년 전 우리나라는 급속도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그에 따라 회사들도 빠르게 몸집을 불리던 시기여서 회사의 한 개 부서가 별도 법인을 설립하면서 부장이 사장이 되는 일도 빈번했다. 회사의 규모가 커지면 소요 인력도 많아 신입직원들은 물밀듯이 들어오고 원래 있던 사람들은 금세 승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직접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 성공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 성공 스토리를 지켜본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많기 때문인지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여전히 긴 시간을 일한다. 학생들도 긴 시간을 공부에 쏟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방법을 진리라고 여기기 때문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것이 진리로 남아있을까? 학생들의 장래희망 중에 '건물주'가 있다는 것에서, 성실한 직장인이 평생 벌 수 있는 돈을 누군가는 부동산 차익으로 벌었다는 사실에서, 열심히 노력한 고소득 흙수저는 40% 수준의 소득세를 내고 아무 노력 하지 않은 금수저가 여러 방법으로 세금을 면제받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소위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명제가 거짓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된다.
2. 강대국의 위선에 대하여
자유로운 시장경제, 그리고 보호무역에 대해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의견을 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가끔 역겨움을 느낄 때가 있는데(조금 과한 표현이지만 달리 이 표현밖에 없다) 자신의 의견을 절대 '선'으로 취급하거나 자신의 관점을 이 세상이 진보 옳은 방향이라고 이야기하는 부류를 만날 때가 그렇다.
무역에 관한 강대국의 모습을 비판하고 싶다. 소위 후진국과 개도국, 힘없는 국가는 권투 경기의 플라이급 선수와 같은 것이다. 실력이 없다기보다는 규모가 좀 작다. 그런데 플라이급 선수가 헤비급 선수와 자유로운 룰로 겨룬다는 게 말이 되는가? 강대국의 자유무역 강요는 이런 것이다. 플라이급 선수에게 부여된 핸디캡에 대해 헤비급 선수가 평등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그 헤비급 선수의 비겁함이 도를 지나쳤다. 심지어 헤비급 선수들이 본인들에게 핸디캡을 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EU 국가들은 환경 규제를 풀지 않으면서 러시아 전쟁이 일어나자 환경 규제에 저촉되는 여러 일들을 추진했다. 미국에서는 자국 산업을 키워 선거에서 인기를 얻어보고자 자국 기업에 대한 IRA/반도체법을 추진했다.
라인홀트 니부어가 100년 전 내놓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한 문장이 떠오른다.
"사회집단의 도덕성은 개인의 도덕성보다 현저히 떨어진다."
3. 총평
이 책은 좀 이상한 책이다. 분명 요리 이야기로 글을 시작했는데, 분명 식재료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세계 경제와 정치의 아주 예민한 주제를 건드리고 있다.
덕분에 아주 재미있게, 한편으론 조금 빡친 상태에서 책을 읽었다.
오늘 글은 여기서 마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