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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생에너지와 전력망(Grid)의 변화빈 노트 2021. 8. 3. 12:44
그레천 바크의 그리드(Grid)를 읽었다. 평소 유튜브에서 최준영 박사님의 지구본 연구소를 즐겨보는데, 거기서 이 책에 대한 내용이 있어서 찾아 읽었다. 최준영 박사님은 이 책 번역에 참여했다.
1. 전력이 공공재가 된 이유
최초의 전력은 공공재가 아니었다. 전력은 커다랗고 비싼 발전기와 전선들을 설치할 수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단지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여러 전력회사가 각자의 전력설비를 설치하여 운용했다. 그래서 같은 도시에도 여러 전압, 주파수, 형태의 전력이 공급되었다. 예를 들어 A회사에서 사용하던 전구를 B회사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만약 집앞에 멀쩡히 전선이 깔려있어도 내가 사용하는 전구나 설비가 그 전선에 흐르고 있는 전기와 맞지 않다면, 그에 맞는 발전소로부터 다시 전선을 깔아야했다. 그래서 전기가 발명된 이후에도 한동안은 대중화되지 못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은 이전과 같이 땔감이나 석탄, 바람과 물의 흐름을 이용해 에너지를 얻어야 했다.
시간이 지나 사무엘 인설이란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에디슨 전력회사의 사장이었는데, 각 설비 종류별로 나누어져있던 전력회사들을 인수합병하였다. 인설은 각 회사간 다르던 규격을 통일하여 하나의 전기제품을 여러 곳에서 사용할 수 있게했다. 그리하여 설비당 이용고객 수와 소비전력량이 올라갔는데, 사람들이 잠들기 전 잠시 불을 비출때만 제 몫을 다하던 전력설비들이 이젠 쉬지 않고 돌아가게되어 투자비 회수기간이 단축되었다. 당연히 전력의 공급단가는 낮아졌고, 자연스레 땔감, 프로판가스, 석탄을 쓰는 것보다 전력을 사용하는 것이 편리하고 저렴해졌다. 시간이 지나 인설은 전력사업에 독점이 필요한 논리를 설득력있게 만들었다. 그 결과 국가에서 전력사업을 관리하는 것을 제도로 정착시켰다. 현재와 같은 공공재로서의 전력시장은 사무엘 인설의 작품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2. 더 효율적인 방향으로만 커져왔던 전력시장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전력이 다른 에너지원보다 편리하다는 걸 알았다. 전기제품은 규격화된 코드만 꽂으면 작동을 위해 번거로히 준비할 것도, 어려운 기술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시끄럽지도 않고 그을음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어서 실내든 실외든 어떤 장소도 괜찮았다. 다만 전선을 꽂아야하니 움직임만이 제한될 뿐이었다. 전력수요는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정부에서도 농촌 전화사업을 통해 전력망 확대를 독려했다.
전력수요가 증가하는 것은 전력공급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익인 일이었다. 전력설비는 커질수록 효율이 좋았다. 내연기관을 돌려서 발전터빈을 돌리는 것보다 큰 석탄화력보일러나 원자로를 활용해서 돌리는 것이 더 저렴했다. 여기저기 흩어진 100개의 발전기를 100명의 사람이 운전하는 것보다 커다란 1개의 발전기를 12명이서 4조 3교대 운전하는게 더 효율적이었다. 더 효율적이고 저렴하게 발전하기 위해 발전소의 단위용량은 커졌고 전력망(Grid) 또한 더 높은 전압에서 더 큰 전류를 견딜 수 있게 거대해졌다. 전력공급자는 더 커진 설비로 원가를 낮추어 마진을 확보할 수 있었고 전력소비자는 충분한 전력을 땔감이나 프로판가스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실제로 물가상승률 대비 전력요금 상승률은 낮다.)
3. 환경, 새로운 시장질서의 등장
2000년대 이후부터는 시대가 바뀌었다. 유럽에서 탄소저감이라는 새로운 대전제를 세운 것이다. 개도국 이하의 국가들의 성장을 막는 진입장벽 높이기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것을 뒤엎는 논리를 만들지 못했다. 실제로 지구의 온도는 올라가고 있고 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전력시장은 이 대전제를 맞추기위해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를 바꿔야할 처지에 놓였다. 궁극적으로는 전력시스템에서 주 전력공급원인 석탄, 석유, 가스발전소를 없애고, 그 자리에 태양광, 풍력과 같은 신재생 발전의 비중을 늘려야 했다. 그리하여 신재생 발전원 비중을 높이는 정책이 미국을 필두로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전력망(Grid)이었다. 발전원만 신재생발전원으로 바꾸면 될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과거보다 훨씬 많은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4. 신재생 발전원 도입의 한계
전력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은 전력공학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전력이 가진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전력시장을 물건파는 도소매시장처럼 바라보았다. 그래서 미국의 경우 전력시장을 발전, 송변전, 배전으로 나누었고 여러 민영기업들이 각 부분을 맡아서 운영하게 했다. 물론 전력시장에 참여하는 기업들은 모두 자기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것은 나쁜 행동도 좋은 행동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리드는 점점 효율을 잃었다.
탐욕(Greedy) 알고리즘이라는 것이 있다. 매 선택의 순간마다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여 최종적으로 최적에 가까운 결과를 도출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빠르게 의사결정을 진행하면서도 최적에 가까운 결과값을 도출 할 수 있어 효율적이다. 하지만 최적의 결과를 도출하는 방법은 아니다. 매 선택의 순간마다 이 다음에 일어날 변수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력망은 하나의 시퀀스이다. 오래된 가정집의 전선이 합선되어 불꽃이 일어나는 것, 송전탑에 낙뢰가 떨어지는 것 모두 전력망 전체에 영향을 준다. 그리드는 분리할 수 있는 산업이나 영역이 아닌 하나의 매커니즘인데, 각 부분을 나누어 놓았다. 각 부분에 세워진 주식회사들은 주주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수 많은 발전회사는 정부의 발전보조금과 좋은 환경수용성을 가진 신재생 발전설비를 늘렸다. 송배전망 사업자는 설비유지보수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전선 아래에 있는 나무의 가지치기 횟수를 줄였다. 이 각각의 선택은 전혀 전력망에 위협적이지 않고 오히려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사건이 발생하자 앞서 한 각각의 선택이 동시다발적인 약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신재생 발전원 도입을 위한 규제를 완화한 2000년대 이후 미국의 전력망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정전이 발생한다. 전력시장에서 발생한 탐욕 알고리즘의 결과값은 이러하다.
미국을 비롯해 우리나라를 포함한 정부기관에서는 신재생 발전원을 빠르게 도입하면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려는 욕심이 있었다. 민간기업에게 충분히 인센티브를 주면서 시장 참여기회를 보장하면 신재생 전력시장이 확대될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 예측은 틀렸고, 이미 100년전 사무엘 인설을 통해 증명되었다. 분산된 전력시장 참여자들은 전기사용자보다 자신의 이익과 설비를 잘 운영하는게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분산된 전력시장에서 전체 전력망(Grid)의 주인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상치 않은 곳에 우후죽순 생겨나는 신재생 발전사를 위해 적자를 보며 송,배전망을 설치할 사업자는 없다. 예고도 없이 발전을 멈춰버리는 태양광, 풍력 발전사를 위해 보일러에 불만 붙여놓고 기다릴 화력발전 사업자도 없다. 신재생 사업 참여의 규제가 풀린 미국에서는 그렇게 할 사업자가 없어서 정전이 발생했다. 다행히 한국은 공기업인 한국전력의 규모가 우리나라 전력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안정적으로 전력공급이 가능했다.(하지만 한국의 전력시장도 민간에 개방된 상태이다.) 신재생 발전량을 늘리기 위해선 전통적인 전력시스템과 정책을 벗어나는 무언가가 필요한 이유다.
5. 신재생 발전원을 효과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방법
전력망은 위에서 말한 수도망과 달리 시스템 내 각 요소 간 주고받는 이벤트의 속도가 매우 빠르다. 가령 서울 강북에서 아무리 큰 수도관에 파괴된다고해서, 그 즉시 강남에서 물 끊어지는 일은 없다. 하지만 전기는 다르다. 서울 강북에서 큰 송전선 하나가 끊어지면 서울 전체가 일시적인 정전을 겪을 수 있다. 바로 신재생 발전원 도입이 어려운 원인 중 하나이다. 태양광, 풍력발전소의 발전량은 일정하지 않다. 그러다보니 송전망 사업자는 신재생발전소에서 나오는 전력이 언제 중단될지 알 수 없어 항상 화력발전소나 원자력발전소로부터 전력을 공급받을 준비를 해야한다.
현재 전력망이 과거의 발전시스템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것도 문제다. 용량이 큰 발전소를 중심으로 우리 몸의 대동맥과 같은 굵은 전선과 커다란 송전탑이 세워져있다. 그리고 전기 사용자에 가까워질수록 송전탑보다는 작은 전봇대가 서있고 더 얇은 전선이 깔려있다. 현재 전력망은 원래의 설비에 알맞게 설치되있다. 이후의 증설계획도 토지개발계획이나 국가의 전력망 계획에 따라 정해져있다. 반면 신재생 발전원은 그렇지 않다. 위치가 제한되어 있지않고 짓는 시기도 정해져 있지않다. 신재생 발전사업자는 애써 한전의 전력망에 발전소를 연결하여도 한전의 송전탑이나 변전소의 용량이 부족할 수 있다. 부족하다면 증설을 기다려야 한다. 최악의 경우 송전탑이나 변전소를 새로 세워야할수도 있고, 이 경우 지역 민원을 해결하는데 4년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렇다고해서 한전이 큰 비용을 들여가며 전력망을 무조건 크게 할 수도 없다. 10년, 20년 후 민간에서 어디에 신재생발전소를 지을지 예측할 능력은 더욱 없다.
이와 같은 이유로 2010년부터 우리나라는 신재생 발전시장을 개방하고 규제를 완화하였음에도 눈에 띌만한 성장을 보지 못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2030년이 되어도 신재생 발전시장은 제자리 걸음일 것이다. 그럼 어떡해야할까.
아래는 신재생 발전원을 효과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내 생각이다.
첫 번째는 국가주도로에 대규모 신재생 발전사업을 추진하는 것이다.
발전소 크던작던 송전탑 전압이 높든 낮든간에 내 집 근처에 지어진다고해서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역주민은 거세게 반대할 것이고 지역주민이 뽑은 지방자치단체, 여러 정부기관와 이익단체가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반대할 것이다. 실제로 민간회사 중심으로 각 지역마다 산개하여 진행된 전력사업은 예정대로 준공된 것보다 지연된 것이 훨씬 많다. 그리고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인식된 전력설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추후 전력사업을 더 힘들게 하고 있다.
고로 민원 대상을 줄여야한다. 가급적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얽히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를 위해선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발전단지를 구축하는 것보단 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구축하는 것이 유리하다. 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하려면 사업당 설비용량을 키워야한다. 설비용량을 키우려면 큰 돈이 필요한데, 큰 돈을 투자받기 위해선 투자가들이 그에 따른 적정 이윤이 계산할 수 있도록 사업이 믿을만 해야한다. 결과적으로 국가주도로 대규모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두 번째는 한국전력의 역할을 재편해야한다.
현재 한국전력과 자회사들은 과거의 전력시장에 맞추어 나누어져있다. 그러나 신재생 발전원 도입을 위해선 전력공기업의 역할을 바꾸어야한다. 발전, 송전, 배전으로 전력시장을 나눈 것은 탄소를 절감하고 안정적이며 효율적인 전력공급을 하는데 좋은 점이 없다.
내가 생각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한국전력과 자회사를 크게는 전력사업 부지 개발사(Developer)와 발송배전을 한번에 운영하는 기업으로 나누는 것이다. 부지 개발사는 기존 부동산 개발사와 같은 역할이다. 사업성 있고 부지 개발이 용이한 곳을 찾아 민원을 해결하고 부지의 용도변경을 일임한다. 이렇게하면 빠른 민원 대응이 가능하고 부지 개발계획에 따라 전력사업자가 설비 증설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발송배전을 한번에 운영하는 기업이 필요한 이유는 신재생 부하의 변동성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신재생부하 운용을 위해 다른 발전소를 유연하게 운전할 수 있어야하고 어떤 경우에는 ESS와 같은 고비용 전력저장장치를 설치해야할 것이다. 또한 과거에는 신재생사업자와 송전사업자가 나누어썼던 전력망을 공유하는 것도 가능하다.
세 번째는 전력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국가 전력사업 위원회가 필요하다.
현재 대표적인 전력사업자인 한전 사장의 임기는 3년이다. 사장은 사실상 정부가 임명하고 있다. 여느 기업과 마찬가지로 임기가 제한된 사장은 짧은 임기간 성과를 내기위해 단기적 성과에 집착한다. 때에 따라선 임명권자인 정부의 입맛에 맞게 선심성 사업도 해야한다. 이러다보면 장기적인 관심과 비용이 필요한 사업들이 소외되거나 중단되곤 한다.
전력사업은 정부의 임기보다 장기적인 시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고로 정부와 독립된 전력사업 위원회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위원을 여야, 전력산업계, 학계, 시민단체로 나누어서 임명한다. 그리고 각 위원의 임기는 충분히 보장되어 각 계의 목소리를 충분히 담아서 국가의 전력사업이 그리디 알고리즘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한다.
6. 마무리
전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니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몇몇 문제가 있을 때마다 전기를 물에 빗대에 생각해보곤 한다. 그리드를 읽고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어 상수도 시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도시에 상수도 시설구축을 계획한다고 하자. 커다란 저수지나 댐에서 물을 대어다 공급하는게 좋을까? 아니면 각 집집마다 우물이나 지하정을 파서 물을 공급하는게 좋을까? 수질, 수량, 대지상태를 예측할 수 없는 지하수보단 댐에서 물을 대는 것이 안정적인 상수도 공급에 용이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정부에서 수도공급사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여 민간에서 여러 저수지와 관정을 팔 수 있게 허가를 내준다면 어떠할까? 어느 관정에서 얼마만큼의 수량이 나올지 알 수 없으니 수도관을 운영하는 담당하는 기관은 한번 수도관을 건설할 때 평소보다 많은 돈을 들여 넉넉한 용량의 수도관을 매설할 것이다. 그렇지않아 용량이 부족하면 수도관이 파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예상치 않게 수도관이 파괴된다면 수압이 떨어져 도시 전체가 물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어떤 수원지에서 오염된 물이 흘러나와 도시 전체의 사람들이 아프게 된다면 그 누구도 수도시설을 사용하지 않고 알아서 물을 길러서 사용하려 할 것이다.
어떤 단어는 듣는 것만으로 기분을 언짢게 하곤 한다. 규제, 독점이라는 단어의 뉘앙스는 부정적이다. 하지만 이 부정적인 느낌은 그로 인한 몇몇 폐혜를 겪었기에 학습된 것이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선 규제와 독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득인 경우도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현재의 전력시장에서 신재생 발전량을 늘리긴 위해서 규제와 독점이 필요하다. 탄소 중립이라는 새로운 규칙에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선 그 방법이 효과적이며 비교적 확실하다. 물론 고여있고 보장받은 권력, 규제와 독점으로 보호받는 권리는 부패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정도의 규제와 독점을 기술의 발전, 그리고 사회 시스템의 발전을 통해 견제할만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거보다 더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고 더 빨라지고 편리해진 통신망과 디바이스를 통해 누구든 감시 할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다.
앞으로 신재생 전력사업이 잘 정착되어 우리나라가 탄소없는 나라가 되는데 일조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끝.'빈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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